디엔비엔푸 전장에서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호치민 주석이 이끄는 우리 당은 역사적인 전역을 위한 모든 준비를 신중하게 고려하고 계산했습니다. 특히, 군수품 수송과 도로 개통을 포함한 물류가 핵심 과제로 지정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창의적인 형태를 통해 수만 톤의 식량을 운반하여 디엔비엔 푸 전역의 승리를 위해 봉사했습니다. (디엔비엔푸 역사승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베트민은 디엔비엔푸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는 프랑스 군 지도자들이 "베트남이 디엔비엔푸를 공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때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체적인 숫자에 따른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우리 군대 - PV)은 후방 기지에서 400km 떨어진 곳, 물류가 제공되는 중국 국경 관문에서 약 600~700km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벌이는 7,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수만 톤의 탄약과 식량을 500대의 트럭으로 유일한 도로인 41번 고속도로를 통해 운송해야 했는데, 이 도로는 항공기의 잦은 폭격으로 피해를 입었습니다. 보병대대에는 하루에 1,000kg의 쌀이 필요하고, 한 달이면 30톤, 20일 동안은 트럭 15대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병력에 식량을 공급하려면 트럭 300대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베트민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트럭을 동원해야 합니다. 베트민은 식량 외에도 탄약, 폭발물, 가솔린, 의약품 등 전투 군대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운반해야 했습니다. 또한, 유일한 도로가 자주 폭격을 당하고, 손상된 구간을 수리하고 다시 연결하기 위해 자재를 운반해야 하기 때문에 지연도 고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베트민은 수 톤의 식량, 도로 수리 도구, 수천 입방미터의 가솔린, 수천 톤의 탄약 등을 운반할 수 있는 트럭을 최소 2,000대 보유해야 했습니다.
프랑스의 계산은 비합리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디엔비엔푸 전역을 위해 식량과 탄약을 준비하는 일은 매우 어렵거나 쉽지 않았습니다. 전장은 후방에서 500~600km 떨어진 험준한 산악 지형에 위치해 있었고, 자동차 운송로가 파손되었으며, 수로가 없고, 날씨가 불규칙하고, 인구가 희박했으며, 경제가 가난하고 뒤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호치민 주석과 정치국은 다음과 같이 결의했습니다. "전체 국민, 전체 당과 정부는 반드시 모든 힘을 다해 디엔비엔푸를 지원해야 하며, 이 캠페인의 완전한 승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동시에 정부는 팜반동 부총리가 의장으로 하는 중앙전선공급위원회와 각급 전선공급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전선으로, 승리로"라는 슬로건 아래, 디엔비엔푸에서의 전략적 결전을 위한 준비가 1953년 12월 초부터 긴급하고 적극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자유무역지구에서 디엔비엔푸까지의 장거리 수송 조직은 정치국과 중앙군사위원회의 구체적인 규제를 받았습니다. 전선보급위원회는 식량과 물자 수송 및 전방보급총국으로의 노동자 파견(비엣박에서 바케까지, 3구역과 4구역에서 수오이룻까지)을 담당했습니다. 후방 보급 총국은 무기, 탄약, 연료 등을 바케까지 수송한 후 이를 전방 보급 총국에 인계하는 업무를 담당합니다. 전방공급총국은 바케, 수오이룻에서 디엔비엔푸까지의 수송을 담당했습니다. 동시에, 썬라 타운 주변에 예비창고를 마련하고, 31km에서 87km, 투안자오-디엔비엔푸 도로 구간에는 중앙창고를 마련합니다. 이와 함께 바케에서 비엣박(약 300km)과 수오이룻을 거쳐 3, 4 자유무역지대까지 이어지는 도로의 수리 및 유지 관리는 전선공급위원회에서 담당했습니다. 바케, 수오이룻 및 그 이상의 지역에서는 전방공급총국, 지역당위원회, 북서부 저항위원회가 책임을 맡았습니다.
중앙군사위원회와 총사령부는 도로 건설을 준비 작업의 초점으로 지정했습니다. 투안 자오에서 디엔비엔푸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길이가 80km가 넘고 좁으며, 산사태가 자주 발생하고 크고 작은 다리 100개 이상이 파손되었습니다. 351사단의 차량과 포병대가 디엔비엔푸에 도달하게 하려면, 우리는 빨리 이 도로를 개방해야 합니다. 이에 보병 2개 연대와 제151공병연대가 밤낮으로 동원되어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많은 노력 끝에, 투안자오에서 디엔비엔푸까지 가는 도로가 개통되었습니다. 그러나 디엔비엔푸로 가는 유일한 도로 역시 적의 맹렬한 공격 대상이 되어 운송과 여행에 많은 장애가 발생했습니다.
1954년 1월 초, 탄약과 쌀의 수송이 긴급히 이루어지는 가운데, 351포병사단이 투안자오-디엔비엔푸 노선에 진입했습니다. 도로는 포병에 우선권을 주어야 합니다. 중앙군사위원회와 참모본부는 도로지휘부를 조직하고, 각 부대의 행군시간을 엄격히 규제하며, 일시정지 장소에 차량과 포병을 은폐하도록 해야 한다. 꼼꼼한 조직과 시간 계산 덕분에 군대의 포병 동원에는 지장이 없었고, 노동자들의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군대와 포병대가 디엔비엔푸 분지 일대의 전장에 도착했을 때는, 그날의 총격전에 대비할 만큼의 총알과 쌀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작가 장 푸제는 그의 저서 "나바르 장군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디엔비엔푸 전장으로 가는 보급로를 생생하게 "다시 그렸다". "작은 바구니, 괭이, 삽을 든 그들(노동자, PV)은 횃불 아래 폭탄 구덩이를 메웠다. 피로, 배고픔, 추위, 질병, 심지어 가볍게 건드리면 즉시 폭발하는 시간 폭발 폭탄이나 "나비 폭탄"이라고 불리는 부비트랩 폭탄까지도 그들의 노동을 막을 수 없었다. 밤새 프랑스 제국주의 요새로 천천히 흘러들어오는 쌀과 탄약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매일 밤 개미처럼 새까만 수만 명의 사람들이 신성한 길에서 보급품을 나르고 있었다. 새벽이 되어 프랑스 비행기가 사진을 찍으러 날아올 때면 길은 텅 비어 있었고, 조종사들은 수리된 폭탄으로 손상된 부분만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디엔비엔푸 요새가 함락된 후,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은 프랑스 기자 장 페랑과의 인터뷰(1956년 5월 12일 파리 매치 370호 게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프랑스는 신중하게 디엔비엔푸 계곡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장단점을 신중하게 고려했습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계산을 했습니다. 디엔비엔푸는 베트민군 기지와 프랑스 기지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항공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베트남군은 비행기가 없고, 스스로 식량을 공급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계산은 매우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계산은 아직 가치가 없습니다. 물류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것은 바로 국민입니다." 그래서 디엔비엔푸의 역사적 승리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는 입증된 진실입니다.
기사 및 사진: Le Phuong
(본 논문은 "디엔비엔푸 - 시대의 황금 이정표", 정보통신출판사, "베트남 공산당 연대기, 제3권: 당은 저항과 국가 건설을 이끈다(1945-1954)", 국가정치출판사의 자료를 활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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